
장소: 지하 서버실, 침입 직후
“도망가! 은율!”
고유성은 외치며 소화기의 안전핀을 뽑아 들었다. 그의 얼굴은 백발의 노인이라기보다는, 삶의 마지막 싸움을 준비하는 노련한 투사 같았다.
“박사님!” 은율은 지수를 안고 주춤했지만, 고유성의 눈빛에서 돌아올 수 없음을 읽었다.
쉬이이익!
고유성이 소화기의 레버를 강하게 눌렀다. 강력한 이산화탄소가 뿜어져 나오며, 연기로 가득 찬 서버실 내부를 하얗게 뒤덮었다. 하얀 포말이 방탄복을 입은 두 명의 그림자들을 덮쳤다.
“컥!” “시야 확보 안 됨!”
그림자들은 당황하며 총구를 허공에 난사했다. 총성 두 발이 낡은 철제 선반에 맞아 튕겨 나갔다. 고유성은 잠시 생겨난 틈을 이용해 지수에게 몸을 돌렸다.
“은율, 서둘러! 이쪽이야!”
고유성은 벽에 숨겨진 낡은 환풍구 덮개를 발로 걷어찼다. 그가 오랫동안 비상용으로 준비해 둔 탈출구였다. 먼지가 쏟아져 내렸다.
은율은 허리에 지수를 묶고, 아까 고유성이 뽑아 넣은 Core Dump의 광학 저장 칩을 손에 꽉 쥐었다. 그는 고유성을 쳐다보았다.
“박사님, 같이 가요!”
“난 이미 충분히 살았네. 이 아카이브는 세상에 공개되어야 해. 네 부모님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약속하게!”
고유성은 은율을 환풍구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가 몸을 돌리는 순간, 소화기 포말이 걷히고 그림자 중 한 명이 고유성 박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은율은 눈을 감고 환풍구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좁고 차가웠다. 그는 지수의 체중 때문에 몸이 끼일 뻔했지만, 아까 화면에서 본 'Operation R-11 (Family Accident)'이라는 섬뜩한 문구만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
복수. 폭로. 이것이 내가 살아남아야 할 유일한 이유다.
그가 환풍구 덮개를 닫으려는 순간, 뒤에서 무거운 둔탁음이 들려왔다. 고유성 박사의 저항이 끝났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은율은 눈물을 삼키고 덮개를 닫았다.
그림자들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그림자 1]: “대상 1 (고유성 박사) 제압 완료. 생체 반응 미약. 데이터 아카이브 확보.”
[그림자 2]: “잠깐. 디코더에 칩이 없다. 대상 2 (은율)가 가져갔다. 칩의 코드는 77A-14로 추정.”
그림자 1은 고유성 박사의 몸을 한 번 훑어보더니, 무전기를 귀에 댔다.
[그림자 1]: "본부, 대상 1 확보, 데이터 칩 유실. 대상 2 (은율)가 데이터 칩을 소지하고 비상 탈출구로 도주 중. 추적을 시작한다. 프로젝트 라자루스 데이터 회수 우선. 대상 1은 현장에서 처리."
그림자들은 냉정하게 환풍구를 바라보았다. 환풍구는 일반인이 지나기 어려울 정도로 좁고, 철근이 얽혀 있었다. 그들은 몸을 구겨 넣는 대신, 강력한 전동 절단기를 꺼내 환풍구를 통째로 절단하기 시작했다.
끼이이이익-! 굉음과 함께 쇠가 갈리는 소리가 지하를 울렸다.
장소: 지하 폐쇄 수로
은율은 지수를 등에 업고, 환풍구를 통해 연결된 낡은 지하 수로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물은 썩은 냄새를 풍겼고, 무릎까지 차올랐다.
“지수야… 조금만 버텨. 이제 거의 다 왔어.” 은율은 지수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수로는 완전히 어두웠지만, 은율은 아까의 예지 능력과 극도의 집중력으로 희미한 출구를 감지할 수 있었다. 그는 과거의 예지 능력으로 수많은 트라우마와 고통을 겪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저주'가 생명을 지켜주는 유일한 축복이었다.
그는 칩이 든 주머니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수로 벽을 따라 필사적으로 걸었다. 이제 그에게 도피는 끝났다. LYNX에 대한 복수와 진실 폭로만이 남았다.
장소: 시내 외곽, 폐기된 주차장 트럭 밑
신형사는 박강호와의 통신을 끊은 후에도 트럭 밑에 숨어 그림자들의 추적을 피하고 있었다. 10분이 흘렀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었다.
그의 구형 단말기에서 '삐빅' 소리와 함께 암호화된 메시지가 도착했다. 박강호였다.
[박강호 (메시지)]: "형님, 고유성 박사 정보 확인. 공식적으로는 '사고로 사망' 처리되었지만, 당시 담당 형사는 LYNX 소속의 보안 요원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음. 이건 명백한 조작이야. 그리고… 한지수 건도 찾았어."
신형사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박강호 (메시지)]: "한지수는 3개월 전, LYNX의 중앙 데이터 서버에 침입하려다 실패했고, 이후 **'예측 범죄 대상'**으로 분류되어 추적당하고 있었어. 형님이 본 건 단순한 해커가 아니야. 놈들의 핵심을 건드린 사람이야."
신형사는 트럭 밑의 흙을 움켜쥐었다. 자신이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몰린 배경, 고유성 박사의 숨겨진 과거, 그리고 지수의 위험성까지. 모든 조각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어. 나를 미끼로 써서 박사님과 지수를 잡으려 한 거야."
신형사는 이제 자신이 단순한 도피자가 아니라, LYNX의 의도대로 움직여온 말이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들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다.
그는 폐기된 주차장을 벗어나, 지하 세계로 향하는 맨홀 뚜껑 쪽으로 발을 옮겼다. 은율과 지수가 반드시 살아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