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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미래를 엿보는 눈, 사라진 그림자를 쫓다 34화

소설공방 2025. 11. 6. 16:52

 

서울 외곽, 폐기된 창고.

사립 병원에서의 필사적인 탈출 직후, 신형사는 외곽의 폐기된 창고로 몸을 숨겼다. 지수 경위는 급히 해독제를 투여받았지만, '순백(Blank Slate)' 약물의 여파로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더 이상 텅 빈 눈동자는 아니었다.

"약물 효과가 완전히 사라지려면 며칠 걸릴 거야. 다행히 뇌 기능에는 영구적인 손상이 없을 것 같아." 신형사가 그녀의 맥박을 확인하며 말했다. 그는 전직 특수 요원이었고, 비상 상황을 대비한 최소한의 의료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은율은 지수의 손에 쥐여 있던 작은 LYNX 칩을 꺼내 들었다. 칩은 폭발의 열기로 인해 형태가 일그러졌지만, 여전히 미약한 열을 내고 있었다. 이 작은 칩이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지수 경위가 말한 '신호(Signal)'가 문제입니다." 은율은 주머니에서 꺼낸 너덜너덜한 종이 위에 글을 썼다. 능력 없는 예언자가 된 그는, 오직 논리와 자료에 의존해야 했다.

"신호... 원격 제어 장치. 최 회장이 AI 파괴 후 흩어진 데이터를 다시 불러 모으려는 목적인가?" 신형사가 물었다.

은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파수꾼 AI의 자폭은 크로노스 프로젝트 서버의 방대한 데이터 조각들을 도시 전체에 흩뿌렸습니다. 최 회장은 그 조각들을 원거리에서 끌어당겨 LYNX 프로젝트의 원형 서버에 재조립하려는 겁니다. 마치 거대한 자석처럼요."

"그런 대규모 데이터 수집 신호라면, 일반적인 무선 통신 주파수가 아닐 거야. 강력하고, 지향성이 높은… 일반적인 노이즈로 위장될 수 있는 무언가겠지." 신형사가 자신의 무전기와 스펙트럼 분석기를 꺼내 들었다. 경찰 시절, 그는 통신 감청 분야의 베테랑이었다.

은율은 신형사가 병원 탈출 직전에 회수한, 오 팀장의 무전기 주파수 설정을 복사한 데이터를 분석했다. "오 팀장의 무전기에는 일반적인 보안 주파수 외에, 단파 영역대(Shortwave Band)의 특정 채널이 등록되어 있었습니다. 보안 통신용이라고 하기엔 너무 불규칙한 채널이었습니다."

신형사의 눈이 번쩍 빛났다. "단파 영역대? 그건 예전 아카이브가 보안이 취약한 외부 통신을 위해 사용했던 방식이야. 오래되고, 추적하기 어렵지. 아카이브의 시초와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겠군."

신형사는 즉시 단파 영역대 수신기를 작동시켰다. 창고 안은 지지직거리는 잡음으로 가득 찼고, 은율은 귀를 찌르는 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능력을 잃었지만, 감각은 여전히 예민했다.

"신호가 잡혔다!"

신형사는 스펙트럼 분석기 화면을 은율에게 보여주었다. 화면에는 도시 전역의 복잡한 주파수 파형들 사이에, 매우 규칙적이고 강력한 펄스 신호가 감지되고 있었다. 신호는 짧게 터졌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거대한 데이터를 압축하여 전송하는 듯한 패턴을 보였다.

"이건… 신호가 한 곳으로 모이고 있다는 뜻입니다." 은율이 말했다. "마치 중앙 서버가 주변의 수많은 위성 신호를 수신하는 것처럼요. 송신은 불규칙하지만, 수신은 일방적입니다. 최 회장이 원하는 데이터를 모두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신형사는 펄스 신호의 발생지를 역추적하기 위해 긴급 네트워크망을 가동했다. 그는 경찰의 공식 채널이 아닌, 과거 자신과 은율의 아버지 하진의 조력자들이 구축했던 비공식 정보망을 이용했다.

몇 분간의 집중적인 분석 후, 신형사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발생지가 잡혔어! 정확히 네가 지목했던 세 번째 지점이야! 15년 전 하진이 사고 현장과 인접한 폐쇄 구역!"

은율은 지도 위에 펜으로 동그라미를 쳤던 그곳을 다시 보았다. 낡은 'H' 산업 부지. 10년 전 대규모 산업 폐기물 처리 문제로 폐쇄된 곳이었고, 외부는 완벽히 버려진 것처럼 보였다.

"지하 시설이 확실합니다. 그곳은 겉으로 보기엔 단순한 폐기물 처리장이었지만, 과거 LYNX 프로젝트의 시초가 되는 초기 연구 모듈을 숨기기 위해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은율은 LYNX 칩을 꽉 쥐었다. "최 회장은 LYNX 원형 모듈을 재가동하여, 파수꾼 AI의 예측 데이터를 덮어씌울 겁니다. 성공한다면, AI보다 훨씬 예측 불가능하고 위험한 **'최 회장만의 AI'**가 탄생할 겁니다."

"그럼 시간이 없어. 신호 수집이 완료되기 전에 막아야 해." 신형사가 총기를 점검했다.

은율은 신형사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혼자 가셔야 합니다, 신 팀장님."

신형사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은율을 바라보았다. "뭐? 너 지금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잊었어? 내가 어떻게 널 두고 가!"

"저에게는 LYNX 칩이 있습니다. 최 회장이 원격으로 데이터 수집을 완료하면, 그의 시스템은 제어 불능이 될 겁니다. 제가 LYNX 칩을 원형 모듈에 삽입하여 데이터 역류를 시도해야 합니다. 제 능력은 사라졌지만, 제가 흡수한 '사실(Fact)' 데이터와 이 칩의 충돌이 최 회장의 계획을 멈출 유일한 방법입니다."

은율의 눈에는 15년간 능력이 부여했던 고통이 아닌, 스스로의 의지와 책임감이 담겨 있었다. 능력 없는 예언자로서, 그는 이제 자신의 지성과 용기로 미래를 만들어가야 했다.

"저는 지수 경위를 지키겠습니다. 신 팀장님은 이곳 경찰 병력과 아카이브 보안 인력이 대치하는 동안, 지하 시설로 침투하여 최 회장의 원격 제어 장치를 무력화해야 합니다. 그리고 저와 접선할 방법을 찾아야 해요."

신형사는 잠시 침묵했다. 은율의 논리는 완벽했고, 그의 결의는 단단했다. 신형사는 결국 한숨을 쉬며 은율의 어깨를 쳤다.

"좋아. 능력 없는 예언자가 이젠 지휘관 노릇까지 하는군. 하지만 기억해. 너는 내 조카와 같은 존재야. 무모한 짓은 절대 금지다." 신형사는 자신의 총알이 가득 찬 탄창 두 개를 은율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너의 호신용이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지수와 함께 이 창고를 지켜."

은율은 신형사에게 마지막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신 팀장님. 최 회장의 최종 목표는 '데이터의 완벽한 재조립'입니다. 원격 제어 장치를 파괴하지 못한다면, 제가 LYNX 칩을 가지고 직접 지하로 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저희는 2시간 뒤, 이곳에서 다시 만납니다."

신형사는 창고 문을 열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은율은 창고 안, 잠들어 있는 지수 경위와 자신의 손에 쥔 LYNX 칩을 번갈아 보았다. 폐쇄된 'H' 산업 부지에서 강력하게 송출되는 '신호'는 마치 그의 마지막 희망을 삼키려는 듯, 끊임없이 펄스를 내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