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아카이브 본부 폭발 사건 발생 3일 후.
도시 전체가 혼란과 경계 속에 잠겨 있었다. 아카이브 본부의 지하 실험실에서 발생한 강력한 폭발은 테러로 공식 발표되었고, 강 국장과 최 회장은 실종 처리되었다. 경찰은 대규모 수사팀을 꾸렸지만, 내부 배신자와 거대 조직의 잔해만 남은 상황에서 수사는 미궁에 빠졌다.
은율은 한적한 외곽의 안전 가옥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온몸의 상처는 아물고 있었으나, 가장 큰 변화는 머릿속의 침묵이었다. 15년간 그를 괴롭혔던 예지 능력의 통증도, 미래를 예고하던 잔상도 모두 사라졌다. 능력 봉인 타이머가 0이 되면서, 그는 문자 그대로 평범한 인간이 된 것이다.
하지만 평범함은 그에게 안도 대신 공허함을 안겨주었다. 15년간 그를 이끌어온 것은 고통스러운 능력과, 그 능력을 통해 쫓아야 했던 그림자였다. 이제 그 모든 것이 사라지자, 그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은율의 곁에는 신형사가 있었다. 20년 전 아카이브 제1 연구소에서 하진의 LYNX 칩 데이터를 빼돌렸던 조력자, 이제는 은율의 유일한 보호자가 된 신형사는 헌신적으로 그를 돌보고 있었다.
"37층 서버실 폭발 현장에서 강 국장의 흔적을 찾지 못했어. 공식적으로는 사망 처리됐지만, 나는 믿지 않아." 신형사가 끓인 미역국을 은율 앞에 놓으며 말했다. "최 회장 역시 마찬가지야. 시신은커녕, 어떤 DNA도 발견되지 않았지. 아마 지하의 다른 비상 통로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아."
"지수 경위는요?" 은율의 목소리가 떨렸다. 37층 복도에 홀로 남았던 지수 경위의 소식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아직… 행방불명이야. 아카이브 보안 병력에 의해 체포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아. 하지만 공식 기록에는 없어. 그녀가 당신을 위해 시간을 끌었고, 그 대가를 치르고 있을 거야." 신형사는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은율은 LYNX 칩을 만지작거렸다. 파수꾼 AI에 역류 공격을 가한 후, 칩은 완전히 타버린 것처럼 보였지만, 여전히 미약한 발열을 내뿜고 있었다.
"그림자가 저지른 일은 미궁에 빠졌습니다." 은율이 말했다. "수사팀은 파수꾼 AI의 자폭이 테러범의 폭발물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지만, 진실은 강 국장과 최 회장, 그리고 파수꾼 AI의 충돌 때문이었죠."
"그래, 하지만 세상은 진실보다 믿고 싶은 것을 믿지. 그리고 AI가 예측하는 완벽한 미래가 크로노스 프로젝트의 소멸이었다는 너의 마지막 예지... 그것이 최 회장 일당을 무너뜨렸어. 너는 능력을 잃었지만, 이 싸움에서 승리한 거다."
은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신 팀장님. 그림자는 절 이길 수 없었지만, 그의 목적은 달성되었어요. 그는 능력을 잃은 저를 이 세상에 남겼고, 자신이 만들어낸 혼란의 잔상을 수습할 임무를 저에게 떠넘긴 겁니다."
신형사는 복잡한 눈빛으로 은율을 바라보았다. "그림자는 네 능력의 분신이었지. 그럼 이제 그림자는 사라진 건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의 잔상, 그가 남긴 흔적들은 여전히 이 세상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제 그 잔상을 볼 수 있는 눈을 잃었어요."
그때, 안전 가옥의 낡은 무선 통신 장치에서 기분 나쁜 잡음과 함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삐이이… 서은율. 듣고 있나.
은율과 신형사는 동시에 통신 장치를 바라보았다. 음성은 변조되어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익숙한, 차갑고 분석적인 억양이었다.
"누구냐!" 신형사가 총을 꺼내 들며 경계했다.
—나는… 그림자다. 나의 본체는 소멸했으나, 나의 파편(Fragment)은 이 세상에 남았다. 너의 능력은 사라졌지만, 너는 여전히 '예지된 미래'의 유일한 생존자다.
"무슨 소리야! 네가 남긴 혼란을 수습하라는 건가?" 은율이 이를 악물었다.
—아니다. 너의 능력은 나에게, 나의 목적은 너에게 이관되었다. 변조된 음성 속에는 비웃음이 섞여 있는 듯했다. —파수꾼 AI는 파괴되었지만, 최 회장은 AI의 마지막 예측 데이터를 가지고 탈출했다. 그는 이미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있다. 너는 이제 능력 없는 예언자로서, 최 회장이 재건할 새로운 크로노스 프로젝트의 잔상을 쫓아야 한다.
통신은 끊겼고, 낡은 장치는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먹통이 되었다. 그림자의 마지막 메시지, 그의 잔상이자 새로운 임무의 시작이었다. 은율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이제 능력이 아닌 의지만으로 이 어둠 속을 헤쳐나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