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민준은 손에 든 USB를 내려다보았다. 이현우가 건넨, 겉으로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그 작은 물건. 하지만 민준의 머릿속에선 이미 천둥이 치고 있었다. 현우의 눈빛은 절박했고, 목소리는 불안정했다. '믿을 수 있는 건 너밖에 없다'는 그 말이 그의 귓가에 맴돌았다. 민준은 현우를 믿었다. 아니, 정확히는 현우의 눈에 비친 필사적인 진실을 믿었다.
넥서스 코퍼레이션. 이 거대한 기업은 민준에게도 동경의 대상이었다. 혁신적인 기술과 눈부신 성장, 모두가 꿈꾸는 직장이었다. 그런데 현우가 넥서스의 내부 고발을 담은 USB를 건네며,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민준은 심장이 쿵쿵거리는 것을 느꼈다. 넥서스는 그에게도, 아니, 그가 속한 이 사회 전체에 거대한 상징이었다. 그 상징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노트북에 USB를 꽂았다. 경고 메시지 하나 없이 폴더가 열렸고, 수많은 파일들이 민준의 눈앞에 나타났다. 파일명은 모두 암호화되어 있었지만, 첫 폴더의 이름은 '프로젝트 세이퍼(Project Safer)'였다. 민준은 파일을 클릭했다.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고해상도의 CCTV 영상 파일이었다. 영상 속에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바로 이현우였다. 영상 속 현우는 누군가와 치열하게 다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희미하게 보이는 인영. 민준은 그 인영이 넥서스의 보안 책임자, 김선호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영상의 화질이 좋지 않아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걸음걸이와 체형은 김선호와 완벽하게 일치했다.
영상은 갑자기 끊겼다. 그 뒤에 나타난 파일은 '보안 통제실 로그'였다. 민준은 로그를 읽어 내려갔다. 날짜와 시간, 실행된 명령어들이 빼곡히 기록되어 있었다. 넥서스의 모든 시스템 접근 기록을 삭제하는 명령어, 그리고 이현우의 모든 기록을 '존재하지 않는 사용자'로 변경하는 명령어. 모든 것이 현우의 말과 일치했다. 그의 이름, 직책, 심지어 입사 날짜와 퇴사 사유까지 모두 사라졌다. 마치 현우라는 사람은 처음부터 넥서스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민준은 등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다. 단 한순간에, 한 사람의 존재가 송두리째 지워진 것이다. 그는 USB를 황급히 뽑아들었다. 손이 떨려 제대로 쥐기도 힘들었다. 현우가 왜 그렇게 필사적이었는지, 왜 도망치고 있는지 이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해고나 부당 해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존재 자체를 지우려는 거대한 음모였다. 그제야 민준은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진실을 손에 넣었는지 깨달았다. 그는 이 USB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도, 경찰에 신고할 수도 없었다. 이 모든 것이 넥서스의 힘 아래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그는 어디로 도망쳐야 할까. 아니, 현우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민준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그의 삶도 예전 같지 않게 될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이현우는 휴대폰을 쥐었다. 한때 그의 삶이었던, 그리고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이 그 안에 있었다. 텅 빈 연락처 목록, 사라진 메신저 기록, 아무도 그를 알지 못하는 세상. 민준은 유일한 예외였다. 민준은 현우의 존재를 기억하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민준의 반응은 냉담했다. 현우의 눈빛과 목소리에 담긴 절박함에도 불구하고, 민준은 그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네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 리가 없어.' 그 한마디가 현우의 심장을 꿰뚫었다. 가장 믿었던 사람마저 자신을 외면한다는 사실에, 현우는 절망했다.
'그래, 세상이 모두 나를 미쳤다고 하겠지.' 현우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는 마지막 남은 희망을 가지고 그곳을 떠났다. 민준에게 더 이상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는 이제 혼자였다. 아니, 혼자가 아니었다. 그를 지우려는 그림자가 끊임없이 따라오고 있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좁은 골목길을 지나고, 인적 드문 공원 벤치에 몸을 숨기기도 했다. 그의 귀에는 모든 발소리가 그를 쫓는 소리처럼 들렸다.
도시의 불빛은 그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그 불빛 아래,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미약한 존재인지 깨닫게 할 뿐이었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한때 자신이 설계했던 화려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넥서스 코퍼레이션의 본사. 유리벽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은, 그저 도망치는 한 마리의 겁먹은 짐승 같았다. 그 건물의 꼭대기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져 있을 거라 믿었던 과거의 자신이 떠올라 현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그 이름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그때,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 번호는 알 수 없는 번호였다.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현우 씨 맞으시죠?” 현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상대방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그 USB, 저도 같은 것을 가지고 있어요.” 그 말에 현우의 심장이 다시 한번 크게 울렸다. 그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절박함이 느껴졌다. 현우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자신과 같은 편이라고. “당신을 도울 수 있어요. 저와 같은 운명에 놓인 사람들이 더 있습니다. 넥서스가 당신을 노리고 있어요.”
현우는 숨을 들이켰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절망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본 것 같았다. “어떻게… 저를 찾았죠?”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상대방은 짧게 침묵하더니 말했다. “당신의 기록은 지워졌지만, 모든 흔적이 사라진 건 아니에요. 누군가에게는 당신의 존재가 여전히 중요하니까.” 그 말에 현우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외로운 싸움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미지의 조력자와의 이 운명적인 만남이 그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 놓을 것임을, 그는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