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현우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분명 김민성이 아니었다. 차갑고 단호한 그 목소리는 2년 전, 그를 세상에서 지워버리던 넥서스 코퍼레이션의 그림자와 똑같았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는 본능적으로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았다.
"드디어 전화했군. 2년이나 기다렸어."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조용히 비웃었다. "네가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우리의 그림자는 언제나 네 뒤를 밟고 있었어."
이현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하얗게 변했다. 민성이 이미 잡혔다는 사실에 절망감이 밀려왔다. 그는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가장 소중한 친구마저 위험에 빠뜨렸다는 죄책감에 휩싸였다. "민성이에게 무슨 짓을 했지?" 그의 목소리가 격앙되었다.
"걱정 마. 아직은 무사해." 상대방은 여유로운 목소리로 답했다. "네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그 친구는 안전할 거야."
"뭘 원하는데?"
"간단해. 네가 받은 그 USB. 그걸 들고 우리가 지정하는 장소로 와. 그러면 네 친구는 물론,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어."
"무슨 소리야...?" 이현우는 혼란스러웠다. 이 모든 상황이 낯설고 비현실적이었다. 넥서스 코퍼레이션은 그를 세상에서 지우려 했지, 협상을 제안하지는 않았다.
상대방은 이현우의 혼란을 즐기는 듯했다. "이해하기 어려울 거야. 하지만 진실은 간단해. 우리는 너를 필요로 해. 네가 가진 그 USB에 담긴 정보가... 우리에게는 절실해."
이현우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들이 이 파일을 원했다면, 벌써 자신을 찾아와 강제로 빼앗았을 것이다. 그들은 왜 이런 위험한 협상을 제안하는 걸까? 그는 문득 떠오르는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J'. USB를 건넨 의문의 남자. 그는 대체 누구일까? 그리고 그 남자가 이현우를 찾아오도록 유인한 것은 아닌가?
"좋아. 어디로 가면 되지?" 이현우는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 그는 이미 함정임을 알고 있었지만, 피할 수 없었다. 민성을 구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가야 했다.
상대방은 서울 외곽의 버려진 공장을 지정했다. "오후 10시. 혼자 와. 네 뒤에 그림자라도 보이면, 그 친구의 목숨은 장담할 수 없어."
통화가 끊겼다. 이현우는 휴대폰을 꽉 쥐었다. 그들의 함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민성을 위해 그곳으로 가야 했다. 그는 주머니에 든 USB를 만졌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그의 심장을 맹렬하게 뛰게 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도망칠 곳은 없었다. 싸우는 수밖에.
이현우는 주머니에 든 USB를 만지작거리며 카페를 나섰다. 평화로운 일상을 지키기 위해 애썼던 지난 2년의 시간이 무색하게, 그는 다시 세상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오후 9시 30분. 약속 시간까지는 30분이 채 남지 않았다. 도시는 화려한 밤의 불빛으로 가득했지만, 그의 눈에는 오직 목표물인 폐공장의 어둠만이 아른거렸다.
그는 버스에 올라타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다. 모두 평온해 보였다. 누군가의 소중한 삶이 한순간에 지워질 수도 있는 이 무시무시한 게임에 대해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했다. 이현우는 그들의 무지함이 부럽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들을 지켜야 한다는 강한 책임감을 느꼈다. 넥서스 코퍼레이션은 단순히 한 사람의 존재를 지우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회 전체를 자신들의 데이터베이스 안에 가두려 했다. 그들의 '사일런스 프로젝트'가 성공한다면, 모든 사람의 삶이 그들의 손에 좌지우지될 것이다. 이현우는 자신이 이 싸움에서 물러설 수 없는 이유를 다시 한번 되새겼다.
버스는 서울의 외곽을 향해 달렸다. 도심의 네온사인과 고층 빌딩이 서서히 멀어지고, 허름한 상점들과 낡은 간판들이 늘어섰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았다. 함정임을 알면서도, 그는 민성을 위해 그곳으로 가야 했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희생양이 될 생각은 없었다. 그는 넥서스 코퍼레이션이 자신에게 이 USB를 협상 카드로 제안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들이 이 파일을 강제로 빼앗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이 파일을 열 수 있는 해독 코드가 이현우의 머릿속에 있기 때문이었다.
버려진 공장 지대에 도착했다. 스산한 바람이 불었고, 먼지 냄새와 녹슨 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현우는 주머니에 든 USB를 꽉 쥐었다. 이제는 그에게 남은 유일한 무기였다. 그는 공장 입구를 향해 걸었다.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이현우의 눈은 이미 익숙한 듯 주변의 모든 것을 살피고 있었다. 감시 카메라, 적외선 센서, 그리고 사람의 발자국까지. 그는 이 모든 것을 무시한 채, 공장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문이 열리고, 이현우는 거대한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